오이 끝물에 노각이 생겼다|8월 오이밭에서 배운 수확과 씨앗 받기
매일 아침 텃밭에 나가면 나는 제일 먼저 오이 넝쿨부터 살폈다. 엊그제 손가락만 하던 것이 하룻밤 사이에 훌쩍 커지는 게 오이라, 조금만 수확을 늦춰도 어느새 굵고 단단해진다.
그런데 8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그렇게 부지런히 따던 오이가 어느 날부터 눈에 잘 띄지 않기 시작했다. 새로 달리는 열매가 줄고, 넝쿨 아래쪽에서는 누렇게 변한 잎도 하나둘 늘었다.
그러다 무성한 잎사귀를 들추다가 커다란 오이 하나를 발견했다.
어른 팔뚝보다도 굵고 껍질은 누렇게 익어 있었다. 여름 내내 먹던 푸른 오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노각이었다.
미처 따지 못해 충분히 성숙한 오이를 보면서 처음에는 ‘아깝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노각은 여름 오이밭이 이제 끝물로 접어들고 있다는 신호이면서, 한편으로는 무침이 되고 내년을 위한 씨앗까지 남겨 주는 또 다른 수확이었다.
여름 내내 오이를 쫓아다녔다
초여름에 오이 모종 몇 포기를 심을 때만 해도 여름 내내 이렇게 바쁘게 오이를 따게 될 줄은 몰랐다. 장마가 지나고 기온이 오르자 오이 넝쿨은 하루가 다르게 뻗었다. 지지대를 타고 올라간 줄기마다 노란 꽃이 피었고, 꽃이 진 자리에는 작은 오이가 달렸다.
문제는 자라는 속도였다.
아침에 조금 작다 싶어 남겨 둔 것이 저녁이면 제법 굵어져 있었다. 하루 이틀 밭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 잎 뒤에 숨어 있던 오이가 어느새 너무 커져 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한창때는 아침마다 넝쿨 사이를 들여다봤다. 먹기 좋은 크기의 오이를 골라 따고 나면 바구니가 금방 찼다. 오이냉국을 만들고, 오이소박이를 담그고, 이웃에도 나눠 주었다. 그래도 많이 남는 날에는 장아찌까지 만들었다.
여름 텃밭의 풍요란 이런 것인가 싶었다.
오이는 생육이 왕성하고 열매에 수분이 많은 만큼 한창 자랄 때는 토양이 지나치게 마르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열매가 계속 달리는 시기에 수분이 부족하면 식물이 쉽게 지치고 열매 상태도 나빠질 수 있다. 그렇다고 흙이 늘 축축하도록 물을 주기보다는 날씨와 토양 상태를 보고 충분히 말랐을 때 뿌리 쪽에 물을 주는 편이 좋다.
나는 주로 아침이나 해가 기울 무렵 흙 상태를 확인하고 물을 주었다. 그 시간마다 새로 달린 오이를 발견하는 재미도 컸다.
손을 대는 만큼 바로 결과가 돌아오는 듯했던 한여름의 오이밭. 그래서인지 그 왕성한 시기가 계속될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텃밭에는 언제나 끝물이 찾아온다.
잎 속에 숨어 어느새 노각이 된 오이
8월에 들어서면서 오이밭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폭염이 계속되자 나도 한낮에는 밭에 나가기 힘들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살피던 오이 넝쿨을 며칠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 사이 커다란 잎 뒤에서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오이가 계속 자라고 있었다.
잎을 젖혀 보니 길고 굵어진 오이가 하나둘 숨어 있었다. 그중에는 초록색을 지나 누런빛을 띠는 것까지 있었다.
노각은 일반적으로 오이를 어린 상태에서 수확하지 않고 충분히 성숙시킨 것이다. 우리가 평소 먹는 오이는 씨가 완전히 여물기 전에 수확하지만, 그대로 두면 열매가 계속 커지고 껍질 색도 달라지면서 씨가 단단하게 여문다.
처음에는 이런 오이를 발견할 때마다 아쉬웠다.
‘며칠만 일찍 봤으면 싱싱할 때 따 먹었을 텐데.’
하지만 노각이 생겼다고 해서 모두 실패한 것은 아니다. 일반 오이와 먹는 방법이 달라졌을 뿐이다. 어린 오이의 아삭함 대신 충분히 성숙한 노각만의 식감과 맛이 있고, 씨앗을 받을 목적이라면 오히려 이렇게 완전히 익은 열매가 필요하다.
오이밭을 다시 살펴보니 다른 변화도 보였다.
아랫잎부터 누렇게 변하는 잎이 늘고, 한창때처럼 새 꽃과 어린 오이가 쉼 없이 달리지는 않았다. 병이나 해충 때문에 갑자기 쇠약한 것은 아닌지 먼저 살펴야 하지만, 오랫동안 수확한 포기라면 생육 후반으로 가면서 세력이 약해지는 모습도 나타날 수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알았다.
올여름 내내 바구니를 채워 주던 오이에도 이제 끝물이 오고 있었다.
늙은 오이 노각, 버리지 않고 밥상에 올렸다
노각을 처음 마주하면 너무 커지고 누렇게 변해 먹기 어려울 것 같지만, 시골 밥상에서는 오래전부터 노각을 따로 활용해 왔다.
두꺼워진 껍질을 벗기고 반으로 갈라 씨가 들어 있는 속부분을 숟가락으로 긁어낸다. 남은 과육을 적당한 두께로 썰어 소금에 살짝 절였다가 물기를 꼭 짜면 노각무침을 만들 수 있다.
우리 집에서도 고춧가루와 마늘, 갖은양념을 넣어 조물조물 무쳤다.
한창때 먹던 어린 오이와는 맛과 식감이 다르다. 싱싱한 오이 특유의 아삭한 느낌보다는 노각만의 부드럽고 독특한 식감이 있다. 여름이 끝나 갈 무렵에 한 번쯤 생각나는 반찬이다.
노각을 손질하면서 어머니가 해 주시던 여름 반찬도 떠올랐다. 예전에는 텃밭에서 무언가 너무 자랐다고 쉽게 버리지 않았다. 크면 큰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먹는 방법을 찾아냈다.
텃밭을 가꾸다 보면 모양 좋은 것만 수확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갈라진 토마토도 나오고, 굽은 오이도 나오고, 이렇게 미처 발견하지 못해 늙은 오이도 생긴다.
그럴 때마다 버릴 것인지 다른 쓰임을 찾아볼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이번 노각은 후자였다.
며칠 일찍 발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는데, 밥상에 노각무침으로 올라오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수확 시기를 놓친 것이 아니라 다른 수확의 때를 만난 것인지도 모른다.
끝물 오이는 언제까지 두어야 할까?
8월 중순 이후 오이 넝쿨이 약해진다고 해서 날짜만 보고 바로 모두 걷어낼 필요는 없다. 아직 줄기가 건강하고 새 꽃과 어린 열매가 계속 달린다면 조금 더 수확할 수 있다.
반대로 병든 잎이 심하게 늘어나고 줄기까지 쇠약해졌으며 새로운 열매도 거의 생기지 않는다면 밭을 정리할 시기를 생각할 수 있다.
이때 병든 줄기와 잎을 그대로 밭에 오래 두는 것은 좋지 않다. 특히 병해가 의심되는 잔재는 다음 작물에 문제가 되지 않도록 따로 정리하는 것이 안전하다.
나는 끝물의 오이를 보면서 예전처럼 마지막 한 개까지 반드시 따내겠다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게 됐다.
한창때는 하루라도 수확을 놓치면 아까웠다. 그러나 충분히 먹고 이웃에도 나눴다면 몇 개의 오이가 늙는다고 해서 그 여름 농사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끝물에는 어떤 것은 노각으로 먹고, 어떤 것은 씨앗용으로 남겨 두고, 힘을 다한 포기는 걷어 다음 작물이 들어갈 자리를 준비하면 된다.
텃밭에는 심을 때가 있는 만큼 거둘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지나면 비워야 할 때도 찾아온다.
처음에는 그 빈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빈 이랑은 끝이 아니다. 여름 작물이 떠난 자리에 가을 채소가 들어오고, 그 작물이 다시 다음 계절을 이어 간다.
끝물이라는 말에는 쓸쓸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음 작물을 위한 자리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노각에서 내년 오이 씨앗을 받을 수 있을까?
올해는 잘 익은 노각 하나를 씨앗용으로 남겨 보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씨앗을 받으려면 일반적인 식용 오이처럼 어린 상태에서 따는 것이 아니라, 열매가 충분히 성숙할 때까지 두어 씨가 여물도록 해야 한다. 완전히 성숙한 열매를 갈라 씨가 충분히 단단하게 여물었는지 확인한 뒤 씨앗을 분리한다.
오이 씨앗은 주변의 젤状 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짧게 발효시키는 방법도 사용한다. 씨와 속을 용기에 담아 물을 조금 넣고 며칠 두었다가 상태를 살핀 뒤, 깨끗한 씨앗을 여러 번 씻어 충분히 말린다. 너무 오래 두어 씨앗이 발아하거나 상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잘 씻은 씨앗은 서로 겹치지 않도록 펼쳐 완전히 건조한 뒤 종이봉투에 넣어 품종과 채종 연도를 적어 두면 다음 파종 때 편하다.
다만 씨앗을 받을 때 꼭 알아둘 것이 있다.
마트나 종묘상에서 구입한 F1 교배종 오이라면 받아 둔 씨앗을 이듬해 심어도 올해 키운 오이와 같은 모양이나 품질이 그대로 나오지 않을 수 있다. 또 주변에 다른 오이 품종이 함께 꽃을 피웠다면 자연교잡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씨앗 받기는 ‘올해와 똑같은 오이를 반드시 다시 키우는 방법’이라기보다 텃밭에서 한 번 시도해 보는 채종의 재미로 생각하는 편이 좋다.
나는 씨앗 몇 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 바라보게 된다.
봄에 작은 씨앗 하나로 시작한 것이 넝쿨이 되고, 수없이 많은 오이를 내어 주고, 마지막에는 다시 씨앗으로 돌아왔다.
하나의 계절이 한 바퀴를 돈 것이다.
시골가드닝의 생각|끝물은 끝이 아니었다
여름 내내 나는 오이를 쫓아다녔다.
하루만 늦어도 너무 커진다며 서둘러 따고, 바구니가 넘치면 이웃에게 나누고, 그래도 남으면 다른 먹을 방법을 찾았다.
그러다 끝물에 접어든 오이밭에서 커다란 노각 하나를 만났다.
처음에는 놓친 오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껍질을 벗겨 노각무침을 만들어 먹고, 그 안에서 여문 씨앗까지 보고 나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어린 오이에는 어린 오이의 쓰임이 있고, 늙은 오이에는 또 그 나름의 쓰임이 있었다.
텃밭에서는 무엇이든 가장 싱싱하고 아름다운 순간에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닌가 보다.
봄에는 심고, 여름에는 부지런히 거두고, 늦여름에는 조금씩 놓아준다. 그러면서 씨앗을 남기고 다음 작물이 들어올 자리를 비운다.
계절마다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
올여름 오이를 실컷 먹었으니 이제는 넝쿨이 늙어 가는 모습도 조금 편한 마음으로 바라보려 한다.
그리고 내년 여름 다시 오이를 심게 된다면, 바구니를 들고 또 아침마다 오이밭을 헤집고 다니게 될 것이다.
그때는 몇 개쯤 노각이 되도록 놓쳐도 예전처럼 아까워하지 않을 것 같다.
끝물은 모든 것이 끝나는 시간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위해 조금씩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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