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가지는 왜 이렇게 잘 자랄까|매일 수확하며 배운 가지 따는 시기와 텃밭 이야기

 

늦여름 텃밭에서 수확한 윤기 나는 보라색 가지

 이른 아침,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텃밭에 나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짙은 보랏빛이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손가락만 하던 가지가 하룻밤 사이 제법 굵어져 커다란 잎 뒤에 숨어 있다. 바구니를 들고 이 잎 저 잎을 들추다 보면 어느새 열 개가 넘게 담길 때도 있다. 다 따 먹지도 못할 만큼 열리는데도 가지는 늘 그 자리에서 조용히 제 몸을 불린다.

봄에는 다른 채소보다 더디게 자라 애를 태우더니, 장마가 지나고 늦여름에 접어들자 오히려 텃밭에서 가장 부지런한 채소가 되었다. 매일 아침 가지를 따다 보니 이 채소가 내게 건네는 것이 수확의 기쁨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가지는 언제 따야 맛있는지, 왜 여름에 잘 자라는지, 그리고 너무 많이 열린 가지를 어떻게 먹고 나누는지. 오늘은 올여름 직접 가지를 키우며 알게 된 것들과 그 보랏빛 열매 앞에서 배운 이야기를 함께 적어 보려 한다.

심을 때는 가장 볼품없던 모종이었다

봄에 모종을 사다 심을 때 가지는 늘 뒷전이었다. 토마토는 벌써 꽃대가 서고 고추는 잎이 무성한데, 가지 모종만은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줄기는 가늘고 잎은 짙은 초록에 자줏빛까지 돌아 처음에는 어디가 좋지 않은가 싶어 몇 번이나 들여다봤다. 심고 나서도 한동안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옆 이랑의 오이가 하루가 다르게 덩굴을 뻗고 애호박이 첫 열매를 달 때까지도 가지는 겨우 키만 조금 키웠을 뿐이었다.

그때는 마음이 급했다. 물이 부족한가 싶어 물을 더 주기도 하고, 거름이 모자란가 싶어 흙 상태를 살펴보기도 했다. 하지만 가지는 따뜻한 환경을 좋아하는 채소라 봄철 기온이 충분히 오르기 전에는 생육이 더디게 보일 수 있다. 어린 모종일 때는 눈에 보이는 줄기와 잎의 크기만 보고 성장을 판단하기보다 뿌리가 새로운 흙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시간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 물을 지나치게 자주 주거나 성장을 재촉한다고 비료를 과하게 주는 것이 반드시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가지의 모습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줄기가 굵어지고 잎이 넓어지더니 어느 순간 보라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봄에는 가장 뒤처져 보였던 모종이 사실은 자기에게 맞는 계절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그때 성급하게 잘 자라지 않는다고 뽑아 버렸다면 지금 매일 바구니를 채우는 가지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텃밭에서는 눈앞의 성장만 보고 너무 빨리 결론 내리지 않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는 걸 가지를 키우며 다시 배웠다.

여름이 깊어지자 가지의 진짜 계절이 시작됐다

장마가 지나고 무더위가 본격적으로 내려앉자 텃밭의 표정이 달라졌다. 상추는 꽃대가 올라와 잎에 쓴맛이 돌기 시작했고 오이는 끝물에 접어들면서 열매가 굽기도 했다. 올여름 우리 밭의 토마토도 병으로 잎이 말라 가며 힘을 잃었다. 한낮에 밭에 나가면 사람부터 지칠 만큼 뜨거운데, 그 한복판에서 가지만은 오히려 생기가 돌았다. 보라색 꽃을 계속 피우고 꽃이 진 자리마다 작은 열매가 달렸다.

가지는 따뜻한 기온에서 생육이 활발한 여름 채소다. 그래서 봄에는 더디게 느껴졌던 성장이 충분히 따뜻해진 뒤에는 빨라진다. 요즘에는 아침에 봤던 열매가 다음 날이면 눈에 띄게 굵어져 있을 정도다. 다만 더위에 강하다고 해서 물 관리까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고 흙이 마르는 시기에는 수분 상태를 살펴야 하고, 열매가 많이 달려 가지가 아래로 처지면 지지대를 다시 세워 주는 것도 필요하다.

나는 주로 아침에 밭에 나가 흙 상태부터 살핀다. 표면만 보고 바로 물을 주기보다 흙이 얼마나 말랐는지 확인하고 필요할 때 충분히 준다. 그러면서 시든 잎이나 병든 잎이 없는지, 열매가 너무 무겁게 달린 가지는 없는지도 함께 본다. 특별한 일을 많이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자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변화를 빨리 발견할 수 있다.

봄에는 가장 느려 보였던 가지가 다른 채소들이 지쳐 가는 늦여름에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달라진다. 빠른 것만이 잘 자라는 것은 아니다. 식물마다 좋아하는 온도와 계절이 다르고, 자기 힘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시기도 다르다. 가지에게는 지금 이 뜨거운 여름이 바로 그런 시간인 모양이다.

가지는 크게 키우기보다 알맞을 때 따야 맛있다

텃밭 가지나무에 달린 수확을 앞둔 보라색 가지

가지를 처음 키울 때는 열매가 크면 클수록 좋은 줄 알았다. 조금만 더 키우면 먹을 것이 많아지겠지 싶어 하루 이틀 더 두곤 했다. 그런데 막상 너무 크게 자란 가지를 따 보니 생각과 달랐다. 씨가 눈에 띄게 굵어지고 과육의 부드러운 맛도 떨어졌다. 껍질도 예전처럼 매끈하지 않았다. 그 뒤부터는 무조건 크게 만드는 것보다 껍질의 윤기가 살아 있을 때 제때 수확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게 됐다.

요즘 내가 가지를 딸 때 가장 먼저 보는 것도 크기보다는 표면이다. 짙은 보랏빛 껍질이 반질반질하고 열매가 탄탄하면서도 지나치게 단단하지 않을 때 수확한다. 품종마다 열매 크기와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몇 cm가 정답이라고 정해 놓기보다는 내가 심은 가지의 평소 크기와 색, 윤기를 함께 보는 편이 낫다. 윤기가 줄고 색이 탁해지거나 열매가 지나치게 굵어졌다면 수확 시기를 조금 넘긴 경우가 많다.

특히 한여름과 늦여름에는 가지가 예상보다 빨리 굵어진다. 어제는 조금 작아 보여 남겨 두었던 열매가 다음 날 아침에는 ‘언제 이렇게 컸지?’ 싶을 만큼 달라져 있다. 그래서 열매가 한창 달리는 시기에는 며칠에 한 번 몰아서 보기보다 가능하면 매일 또는 자주 살피는 것이 좋다. 알맞은 크기의 열매를 계속 따 주면 숨어 있던 작은 가지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매일 바구니를 들고 나가는 일이 처음에는 번거로웠지만 이제는 하루를 여는 작은 습관이 되었다. 커다란 잎을 들추다가 딱 먹기 좋은 가지를 발견하면 작은 보물을 찾은 것처럼 반갑다. 반대로 너무 크게 자란 것을 발견하면 ‘어제 딸걸’ 하는 아쉬움도 생긴다. 가지는 많이 키워 한꺼번에 거두는 채소라기보다 좋은 때를 놓치지 않고 조금씩 자주 수확하는 채소라는 것을 올여름 제대로 배우고 있다.

가지를 따러 나갔다가 텃밭 전체의 안부를 살핀다

가지는 부지런히 따 줘야 하는 채소지만 그 덕분에 생긴 좋은 습관도 있다. 아침마다 가지를 보러 밭에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작물까지 살펴보게 된 것이다. 가지 잎을 들추고 열매를 찾다가 옆 고랑의 고추도 보고, 물이 부족해 보이는 곳은 없는지 흙도 만져 본다. 벌레 먹은 잎이나 갑자기 색이 변한 잎도 이렇게 매일 돌아보다 보면 비교적 빨리 눈에 들어온다.

텃밭을 처음 가꿀 때는 문제가 생기면 무엇을 뿌리고 어떤 비료를 줘야 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줄 알았다. 하지만 몇 해 밭을 가꾸다 보니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자주 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제와 오늘의 모습을 알고 있어야 잎 한 장의 변화도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만에 찾아가면 언제부터 이상이 생겼는지 알기 어렵지만 매일 보는 식물은 작은 변화도 쉽게 눈에 띈다.

가지도 마찬가지다. 꽃이 진 자리에 작은 열매가 생기는 것을 보고, 그 열매가 하루하루 굵어지는 과정을 보다 보면 언제 따야 하는지 굳이 자를 들고 재지 않아도 조금씩 감이 생긴다. 텃밭에서 얻는 경험이라는 것이 아마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배운 기준에 매일의 관찰이 더해지면서 내 밭에 맞는 기준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복은 생각보다 즐겁다. 이른 아침 바구니 하나 들고 밭을 한 바퀴 돌면서 오늘 달라진 것을 찾아본다. 가지 몇 개를 따러 나갔다가 고추와 고구마, 잡초와 흙의 상태까지 함께 보고 돌아온다. 하나의 작은 습관이 텃밭 전체를 돌보는 눈으로 이어진 셈이다. 꾸준함이란 거창한 일이 아니라 이렇게 매일 조금씩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다 먹지 못할 만큼 열린 가지, 밥상에 올리고 이웃과 나눈다

요즘 가지밭의 가장 큰 고민이라면 너무 잘 열린다는 것이다. 아침마다 몇 개씩 따다 보면 냉장고 한 칸이 금세 가지로 가득 찬다. 두 식구가 먹기에는 벅찰 때도 있다. 그렇다고 애써 키운 가지를 밭에서 늙게 둘 수는 없으니 늦여름에는 자연스럽게 가지 요리가 자주 밥상에 오른다.

갓 딴 가지는 껍질째 길게 갈라 살짝 쪄서 간장 양념에 무쳐 먹는다. 기름을 두른 팬에 노릇하게 구워 마늘과 간장으로 간을 해도 좋고, 된장찌개에 큼직하게 썰어 넣기도 한다. 바로 밭에서 따 온 가지는 과육이 부드러워 복잡하게 요리하지 않아도 맛이 좋다. 같은 가지라도 찌고 굽고 볶는 방법에 따라 식감이 달라져 생각보다 여러 번 밥상에 올려도 쉽게 질리지 않는다.

수확한 가지를 부드럽게 익혀 양념한 가지 요리

그래도 남으면 얇게 썰어 말린다. 여름 햇볕에 잘 말려 보관했다가 겨울에 물에 불려 나물로 무치면 한여름의 텃밭을 다시 꺼내 먹는 기분이 든다. 말릴 때는 상하거나 너무 늙은 열매보다는 상태가 좋은 가지를 골라 손질하고, 충분히 건조한 뒤 습기가 차지 않도록 보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날에는 몇 개씩 봉지에 담아 이웃과 나눈다. 시골에서 채소를 나누는 일은 특별한 선물이라기보다 인사에 가깝다. “가지가 너무 많이 열려서요.” 한마디와 함께 건네면 며칠 뒤에는 그 집에서 기른 호박이나 고추가 우리 집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다 먹지도 못할 만큼 열리는 가지 덕분에 늦여름의 골목에는 채소뿐 아니라 서로의 안부도 함께 오간다.

정원365의 생각|서두르지 않아도 자기 때는 온다

올봄의 가지 모종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왜 이렇게 안 자라나 싶어 자꾸 들여다보고 물이 부족한가, 거름이 모자란가 걱정했다. 하지만 가지는 멈춰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맞는 온도와 계절을 만나기까지 자기 자리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여름을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 매일 보랏빛 열매를 내어 주었다.

돌이켜 보면 나도 무엇이든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 할 때가 많다. 심었으면 빨리 자랐으면 좋겠고, 애써 한 일에는 금방 답이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텃밭에서는 내 마음대로 시간을 당길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꽃이 필 때가 있고 열매가 굵어질 때가 있으며,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따로 있다.

그렇다고 기다림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아니다. 물이 필요한지 살피고, 무거워진 줄기에 지지대를 세워 주고, 알맞게 자란 열매는 제때 따 주어야 한다. 조급해하지 않되 해야 할 일은 매일 하는 것. 올여름 가지밭에서 내가 배운 것은 어쩌면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에도 바구니를 들고 밭으로 나갔다. 커다란 잎을 젖히니 어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가지 하나가 짙은 보랏빛으로 숨어 있었다. 봄에는 가장 볼품없어 보였던 모종이 이제는 다 먹지 못할 만큼 열매를 내어 준다.

서두르지 않아도 자기 때는 온다. 다만 그때가 올 때까지 제 자리를 지키며 해야 할 일을 계속해야 한다. 오늘도 가지 몇 개를 바구니에 담아 돌아오며, 텃밭에서 또 하나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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