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는 때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새벽 수확부터 가을 텃밭 준비까지

여름 수확철에 수염이 갈색으로 마른 옥수수가 한데 쌓여 있는 모습

팔월 새벽, 아직 이슬이 마르지 않은 텃밭으로 나가면 옥수수밭이 가장 먼저 나를 맞는다. 내 키를 훌쩍 넘긴 옥수숫대가 바람에 서걱이는 소리를 들으면 여름이 절정에 이르렀다는 것을 실감한다.

몇 달 전만 해도 손가락 두 마디만 하던 모종이었다. 물을 주고 풀을 뽑으며 기다리는 사이 어느새 굵은 이삭을 품었다. 그런데 옥수수는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도 넉넉한 시간을 내어 주지 않는다. 알맞게 여문 시기를 며칠만 놓쳐도 알이 단단해지고 단맛과 촉촉함이 줄어든다.

올여름에도 나는 옥수수밭을 여러 번 오가며 수확할 때를 살폈다. 그러다 옥수수를 기르는 일이 결국 기다려야 할 때와 서둘러야 할 때를 구별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옥수수 수확은 서늘한 아침이 좋다

옥수수는 이른 아침에 따는 것이 좋다는 말을 귀촌하고 몇 해가 지나서야 몸으로 이해했다. 처음에는 한낮에 밭일을 하다가 눈에 띄는 대로 꺾어 왔다.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딴 옥수수는 금세 열을 품었고, 삶아 놓아도 기대만큼 촉촉하지 않았다.

옥수수는 수확한 뒤부터 당분이 전분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특히 기온이 높을수록 품질이 더 빨리 떨어질 수 있어, 밭이 서늘한 아침에 수확해 가능한 한 빨리 삶거나 냉장 보관하는 것이 좋다. 이웃 어르신들이 “이슬 마르기 전에 따야 맛있다”고 한 말에는 오랜 경험에서 나온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그 말을 들은 뒤부터 옥수수 수확은 나의 새벽 일과가 되었다. 여명이 밝아 오는 밭고랑을 걸으며 잘 여문 이삭을 골라 아래쪽으로 힘껏 꺾는다. 손에 전해지는 묵직함만으로도 알이 얼마나 찼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갓 딴 옥수수를 코 가까이 가져가면 풋풋한 풀 냄새 사이로 옅은 단내가 올라온다. 나는 원래 새벽잠이 많은 편이지만 옥수수철만큼은 기꺼이 잠을 줄인다. 한 소쿠리 가득 옥수수를 안고 밭을 나설 때면 산골 마을 위로 물안개가 낮게 피어오르고, 멀리서 새들이 하나둘 울기 시작한다. 옥수수를 거두러 나갔다가 하루 중 가장 맑은 시간까지 덤으로 얻어 오는 셈이다.

옥수수 수염이 알려주는 수확 시기

옥수수 재배를 처음 시작했을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수확 시기를 판단하는 일이었다. 이삭이 껍질에 싸여 있으니 알이 얼마나 여물었는지 한눈에 알기 어려웠다. 궁금하다고 껍질을 자꾸 벗겨 보면 어린 이삭에 상처를 내기도 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알게 된 가장 쉬운 기준은 옥수수 수염이다. 처음에는 연하고 촉촉하던 수염이 알이 차면서 갈색으로 변하고, 끝부분부터 마르기 시작한다. 수염이 짙은 갈색으로 말랐고 이삭을 쥐었을 때 전체적으로 통통하고 단단하게 느껴진다면 수확 시기가 가까워졌다는 신호다.

그래도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이삭 윗부분의 껍질을 조금만 벌려 알 하나를 손톱으로 눌러 본다. 맑은 물 같은 즙이 나오면 아직 덜 여문 것이고, 우유처럼 뽀얀 즙이 배어 나오면 먹기 좋은 시기다. 즙이 거의 나오지 않고 알이 단단하다면 수확 시기를 조금 넘겼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이제 밭을 한 바퀴 돌며 수염 색과 이삭의 묵직함을 함께 살핀다. 오늘 딸 것과 하루 이틀 더 기다릴 것을 구분해 두면 한꺼번에 너무 많은 옥수수를 거두는 일도 줄일 수 있다.

물론 지금도 판단이 늘 맞는 것은 아니다. 덜 여문 옥수수를 따서 밍밍한 맛에 실망할 때도 있고, 며칠 늦어 단단해진 알을 씹으며 아쉬워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실패가 쌓이면서 식물이 보내는 작은 신호를 조금씩 알아보게 되었다. 텃밭에서 생긴 눈은 책만 읽어서는 얻기 어려운 것이었다.

갈색으로 마른 수염과 통통한 이삭을 확인하며 수확 시기를 살피는 옥수수


한 솥 삶아 이웃과 나누는 여름 저녁

옥수수의 계절은 밭에서 시작하지만 부엌에서 완성된다. 새벽에 거둔 옥수수를 마루에 펼쳐 놓고 껍질을 벗기면 가느다란 수염이 손가락과 옷자락에 달라붙는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알이 고르게 찬 이삭이 모습을 드러날 때마다 마음이 흐뭇해진다.

나는 큰 솥에 옥수수를 넣고 물을 넉넉히 부은 다음 소금과 설탕을 조금 넣어 삶는다. 집집마다 삶는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 집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렇게 먹어 왔다. 뚜껑을 덮고 삶기 시작하면 달큰한 냄새가 부엌에서 마당까지 번진다. 옥수수를 삶는 날이면 이웃집 개가 그 냄새를 먼저 맡았는지 어김없이 짖어 댄다.

문제는 옥수수가 비슷한 시기에 한꺼번에 익는다는 것이다. 며칠 사이 스무 개, 서른 개가 줄줄이 수확할 때를 맞으니 두 식구가 먹기에는 늘 많다. 그래서 옥수수철이면 잘 삶은 옥수수를 소쿠리에 담아 이웃집 문을 두드린다.

앞집 할머니께 몇 개, 아랫집 부부에게 몇 개 나누어 드리고 나면 며칠 뒤 그 집에서 기른 애호박이나 풋고추가 우리 집 마루에 놓여 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제철에 많이 난 것을 서로 건네는 것이다.

도시에서는 값을 매겨 사고팔았을 옥수수가 이곳에서는 안부를 묻는 핑계가 된다. “올해 옥수수 잘됐네”, “비가 적어서 걱정했는데 알이 잘 찼구먼” 하는 짧은 말도 함께 오간다. 김이 오르는 옥수수를 들고 마루에 앉아 알을 하나씩 뜯어 먹는 여름 저녁, 나는 이런 소박한 나눔이 귀촌하며 얻은 귀한 선물이라는 생각을 한다.


껍질과 수염을 벗겨 큰 솥에 담아 놓은 흰 찰옥수수


옥수수가 떠난 이랑에 가을을 심는다

옥수수철은 짧다. 팔월 중순 무렵이면 남은 이삭도 차츰 끝물이 되고, 밭에는 키 큰 옥수숫대가 줄지어 남는다. 처음 텃밭을 가꿀 때는 애써 키운 대를 베어 내는 것이 아까워 며칠씩 미루기도 했다. 하지만 그대로 두면 밑동이 더 단단해지고 뿌리까지 억세져 정리하기가 훨씬 힘들어진다.

요즘은 마지막 이삭을 거두고 나면 옥수숫대를 바로 베어 낸다. 병해충 피해가 없는 대는 잘게 잘라 충분히 썩히면 퇴비 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 다만 옥수숫대는 질기고 분해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그대로 흙에 묻기보다는 작게 자른 뒤 다른 퇴비 재료와 섞어 발효시키는 편이 낫다. 병이 들었거나 벌레 피해가 심한 대는 텃밭에 남기지 않고 따로 처리한다.

옥수수가 떠난 자리는 곧 가을 농사의 출발점이 된다. 나는 뿌리와 잡초를 걷어 내고 흙을 고른 뒤 완숙퇴비를 보충한다. 옥수수는 양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작물이므로 다음 작물을 심기 전에는 흙 상태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퇴비를 넣은 뒤 바로 모종을 심기보다는 며칠간 흙과 어우러질 시간을 두면 어린 뿌리가 상하는 것도 줄일 수 있다.

준비가 끝난 이랑에는 김장용 배추 모종을 심거나 무씨를 뿌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옥수수 그늘에 가려져 있던 땅에서 어린 배추가 새잎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 계절이 한 걸음 옮겨 갔다는 것을 느낀다.

다 자란 작물을 거두고 빈 이랑을 바라보면 아쉬움보다 설렘이 먼저 찾아온다. 텃밭에서 빈자리는 끝난 자리가 아니라 다음 계절이 들어올 자리이기 때문이다.

정원365의 생각

옥수수는 오래 기다려야 하지만 정작 수확할 때가 오면 머뭇거릴 틈을 주지 않는다. 조금 이르면 맛이 덜 들고, 며칠 늦으면 가장 부드럽고 단 순간을 놓친다.

올여름에도 나는 어떤 이삭은 제때 거두었고 어떤 이삭은 때를 넘겼다. 그러나 모든 순간을 정확히 맞히지 못했기에 오히려 수염의 색을 더 자세히 살피고, 손바닥에 전해지는 이삭의 무게를 기억하게 되었다.

삶에도 오래 기다려야 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망설이지 말고 손을 내밀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옥수수가 가르쳐 준 것은 모든 때를 놓치지 않는 완벽함이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온 계절을 알아보려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내년 여름에도 나는 옥수수를 심고 새벽 밭을 걸을 것이다. 잘 여문 이삭을 찾으며 밭고랑을 서성이는 그 시간까지도 옥수수의 제철에 포함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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