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상추가 쓰고 질겨진 이유|꽃대 오른 상추에서 씨앗 받기
아침 일찍 텃밭에 나가 상추 몇 장을 뜯었다. 며칠 전만 해도 부드럽고 달았던 잎인데, 그날따라 이파리가 두껍고 뻣뻣했다. 무심코 한 장을 입에 넣었다가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쌉싸름함을 넘어 혀끝에 오래 남을 만큼 쓴맛이 강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상추들은 어느새 내 허리께까지 훌쩍 자라 꼭대기마다 꽃대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봄에 손가락 두 마디만 하던 모종이 이렇게 자랄 줄은 몰랐다. 여름 텃밭은 늘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방식으로 계절의 속도를 알려준다.
오늘은 여름 상추가 쓰고 질겨지는 이유와 꽃대 오른 상추를 어떻게 정리하면 좋은지, 그리고 남겨 둔 상추에서 씨앗을 받았던 이야기를 적어 보려 한다.
상추는 왜 여름이 되면 쓰고 질겨질까
여름 상추가 쓰고 질겨지는 가장 큰 이유는 높은 기온과 길어진 낮으로 꽃대가 오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상추는 서늘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채소다. 기온이 높아지고 낮의 길이가 길어지면 잎을 넓게 펼치는 영양생장에서 꽃과 씨앗을 만드는 생식생장으로 넘어간다. 이때 줄기가 위로 빠르게 자라며 꽃대를 세우는 현상을 ‘추대’라고 한다.
꽃대가 오르기 시작한 상추는 어린잎을 계속 내는 대신 꽃과 씨앗을 만드는 데 힘을 쓴다. 잎은 점차 두꺼워지고 질겨지며, 쓴맛을 내는 성분의 농도도 높아진다. 상추 줄기나 잎을 꺾었을 때 배어 나오는 하얀 유액에도 이러한 쓴맛 성분이 들어 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이 사실을 몰라 애를 태웠다. 잎이 써지면 비료가 부족한 줄 알고 웃거름을 더 주고, 물이 모자란가 싶어 아침저녁으로 물을 뿌렸다. 그러나 꽃대가 이미 올라오기 시작한 상추는 물과 비료를 더 준다고 다시 봄 상추처럼 연해지지 않았다.
품종과 재배 환경에 따라 추대 시기는 다르다. 그래도 한여름의 높은 기온을 만나면 대부분의 상추는 결국 꽃대를 올린다. 그러니 쓴맛이 강해진 상추를 보며 관리를 잘못했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상추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잎을 내어주던 시간을 지나 제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꽃대 오른 상추, 뽑아야 할까 남겨야 할까
쓴맛을 확인한 그날, 나는 상추밭 앞에 한참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미 꽃대가 오른 상추는 다시 연한 잎으로 돌아오기 어렵다. 텃밭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려면 뽑아내고 그 자리에 다른 채소를 심는 것이 맞다.
실제로 손은 몇 번이나 상추 밑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선뜻 뽑히지 않았다. 봄에 작은 모종으로 시작해 내 허리께까지 자란 상추를 그저 ‘먹지 못하는 상추’라고 부르며 뿌리째 뽑아버리기가 어쩐지 미안했다.
그 앞에서 망설이다 보니 내가 텃밭을 얼마나 결과 중심으로 바라봐 왔는지도 보였다. 먹을 수 있으면 성공이고, 수확하지 못하면 실패라고 여겼다. 하지만 꽃대를 올린 상추도 여전히 살아 있는 식물이었고, 자기 방식으로 한 계절을 완성해 가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상추를 남겨 둘 필요는 없다. 꽃대를 모두 그대로 두면 다음 작물을 심을 공간이 부족해지고, 씨앗이 익기 전에 병해충이나 장맛비의 피해를 볼 수도 있다. 나는 상태가 좋고 꽃대가 튼튼한 몇 포기만 남기고 나머지는 뽑아냈다.
절반의 타협이었지만 그 선택 덕분에, 나는 그해 여름 예상하지 못한 수확을 하나 더 얻게 되었다.
쓴 상추 대신 씨앗을 받기로 했다
남겨 둔 상추는 며칠 사이 작은 노란 꽃을 피웠다. 민들레꽃을 조그맣게 줄여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상추에도 이처럼 고운 꽃이 핀다는 사실을 텃밭을 몇 해 가꾸고 나서야 제대로 들여다봤다.
작은 벌과 등에들이 꽃 사이를 부지런히 오갔다. 꽃이 지고 시간이 흐르자 그 자리에는 하얀 갓털이 달린 씨앗이 맺혔다.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민들레 홀씨와 닮아 있었다.
씨앗을 받을 때는 꽃이 피었다고 곧바로 자르면 안 된다. 꽃이 진 뒤 갓털이 충분히 벌어지고 씨앗이 갈색으로 여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만 너무 오래 두면 바람에 씨앗이 흩어지므로, 갓털이 보이기 시작한 꽃대부터 여러 차례 나누어 거두는 편이 안전하다.
나는 잘 여문 꽃대를 잘라 종이봉투에 거꾸로 담고, 비를 맞지 않는 처마 밑 그늘에서 충분히 말렸다. 며칠 뒤 봉투를 가볍게 흔들자 자잘한 씨앗이 사르르 떨어졌다. 손바닥에 받아 보니 봄에 돈을 주고 샀던 씨앗과 다르지 않았다.
내 텃밭에 심었던 상추가 다시 다음 계절의 씨앗을 만들어 낸 것이다. 쓴맛 때문에 뽑혀 나갈 뻔했던 상추가 마지막까지 가장 오래 남을 것을 품고 있었던 셈이다.
다만 구입한 상추가 F1 교배종이라면 받아 둔 씨앗에서 자란 상추가 부모와 같은 모양과 맛을 그대로 이어받지 않을 수 있다. 같은 특성을 안정적으로 이어 가고 싶다면 고정종이나 재래종에서 씨앗을 받는 것이 좋다. 채종한 씨앗은 완전히 말린 뒤 종이봉투나 밀폐 용기에 품종과 채종 날짜를 적어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 보관한다.
상추를 뽑은 자리에 무엇을 심을까
쓴 상추를 정리한 자리를 오래 비워 두면 잡초가 먼저 차지한다. 그렇다고 8월 초의 뜨거운 밭에 가을 채소를 무조건 서둘러 파종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파종 시기는 지역과 품종에 따라 달라지고, 한낮의 지온이 지나치게 높으면 상추를 비롯한 일부 잎채소의 발아가 고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무와 얼갈이배추는 비교적 생육 기간이 짧아 여름과 가을 사이에 키우기 좋다. 다만 폭염이 이어질 때는 발아가 불안정하고 어린잎이 벌레 피해를 받기 쉬우므로, 기온이 조금 내려간 뒤 파종하거나 차광망과 한랭사를 활용하는 편이 안전하다.
아욱과 근대처럼 더위에 비교적 강한 잎채소를 선택해도 좋다. 이미 자라고 있는 들깨는 한여름에도 잎을 계속 수확할 수 있다. 다만 8월에 들깨 모종을 새로 옮겨 심는 것은 지역에 따라 재배 기간이 짧을 수 있으므로, 남은 생육 기간을 고려해야 한다.
가을 상추는 서두르기보다 지역 기온과 씨앗 봉지에 적힌 파종 시기를 확인해 준비하는 것이 좋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지기 시작할 때 파종하면 봄처럼 부드러운 잎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아직 더운 시기에 씨를 뿌린다면 오후 그늘이 지는 곳을 고르고, 흙이 마르지 않도록 얇게 덮어 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상추가 떠난 이랑에 무엇을 심을지 고민하는 일도 텃밭농사의 일부다. 한 채소의 끝은 빈자리가 아니라, 다음 작물을 맞이할 준비가 시작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가장 쓴 계절이 남겨 준 것
여름 상추의 쓴맛을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아깝고 실패한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쓴맛 덕분에 나는 상추가 꽃을 피우고 씨앗을 남기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내년 봄에 심을 씨앗을 손에 쥐었고, 비워진 자리에 다음 채소를 들이는 방법도 배웠다.
텃밭은 늘 잘되지 않는 일 속에 다음 계절을 위한 힌트를 숨겨 둔다.
올여름 상추가 꽃대를 올렸다면 모두 뽑기 전에 튼튼한 한두 포기만 남겨 보아도 좋겠다. 작은 노란 꽃이 피고 갓털 달린 씨앗이 여무는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상추의 쓴맛은 실패의 맛이 아니라 한 계절을 끝까지 살아낸 맛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