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먹지도 못하면서 | 여름 애호박이 가르쳐 준 나눔의 계절
아침에 텃밭에 나가 보면 어제까지 없던 애호박이 어느새 팔뚝만 해져 넝쿨 아래 매달려 있다. 분명 그제 저녁에는 손가락만 한 어린 것들을 눈으로 살펴보고 들어왔는데, 하루 이틀 눈을 뗀 사이 애호박은 제 몸을 저 혼자 불려 놓는다. 커다란 잎사귀를 들추면 그 서늘한 그늘 속에 연한 초록빛 열매가 쑥 자라 있고, 나는 매번 "또 언제 이렇게 컸담" 하고 혼잣말을 한다. 여름 텃밭의 시간은 사람의 걸음보다 훨씬 빠르게 흐른다는 걸, 나는 이 초록 열매 앞에서 새삼 깨닫는다. 다 먹지도 못할 걸 알면서도, 오늘도 넝쿨 사이를 헤집으며 애호박을 딴다.
하룻밤 새 주먹만 해지는 애호박
애호박을 처음 심었을 때 나는 이 열매가 이렇게까지 빨리 자랄 줄 몰랐다. 오이나 고추는 하루하루 조금씩 굵어져서 눈으로 그 변화를 천천히 좇을 수 있지만, 애호박은 성질이 아주 다르다. 노란 꽃이 지고 나서 그 자리에 손가락만 한 열매가 맺히면, 그때부터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다. 아침저녁으로 후텁지근한 한여름에는 하루에도 몇 센티미터씩 굵어져서, 이틀만 방심해도 애호박은 어느새 늙은 호박처럼 커다래져 버린다. 껍질이 단단해지고 속에 씨가 여물기 시작하면 그 보드랍던 살은 물러지고 맛도 뚝 떨어진다. 그래서 예부터 애호박 농사는 부지런한 사람의 몫이라는 말이 있었나 보다.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을 손등으로 털어 내며 열매를 찾는 그 시간이 나는 은근히 좋았다. 나는 매일 아침 텃밭에 나가 넝쿨 아래를 살피는 일이 하루의 첫 일과가 되었다. 잎사귀를 하나씩 들추며 오늘은 어떤 녀석이 딸 만큼 컸는지 눈으로 더듬다 보면, 어제는 분명 없던 자리에 새 열매가 매달려 있어 놀란다. 이 서두르는 성장 앞에서 나는 늘 자연의 부지런함에 감탄한다. 사람이 잠시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에도 텃밭의 시간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저 홀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애호박은 그렇게, 기다려 주지 않는 계절의 속도를 내게 조용히 가르쳐 주었다.
왜 애호박은 늘 한꺼번에 쏟아질까
애호박을 몇 포기 심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 있다. 처음 한두 개 열릴 때는 그렇게 반갑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감당이 안 될 만큼 한꺼번에 쏟아진다는 것이다. 넝쿨식물인 호박은 줄기가 뻗어 나가며 마디마다 꽃을 피우는데, 한여름 기온이 오르고 뿌리가 자리를 잡으면 암꽃과 수꽃이 앞다투어 피어난다. 벌과 나비가 부지런히 오가며 꽃가루받이를 해 주면 그 많은 꽃이 모조리 열매가 되니, 사나흘 간격으로 열 개가 넘는 애호박이 동시에 굵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한 포기가 아니라 두세 포기를 심었으면 그 양은 곱절이 된다. 나는 첫해에 욕심을 부려 네 포기나 심었다가, 한여름 내내 애호박에 파묻혀 지냈다. 냉장고 채소칸이 애호박으로 가득 차고, 다음 날 아침이면 또 그만큼이 텃밭에 매달려 있었다. 이듬해부터 나는 포기 수를 줄이고 파종 시기를 조금씩 어긋나게 두는 법을 배웠지만, 그래도 한여름의 쏟아짐은 어쩔 수 없었다. 넝쿨은 늘 내 계산보다 너그러웠다. 처음에는 이 풍요가 부담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텃밭은 사람이 먹을 만큼만 딱 맞게 내주는 법이 없다. 자연은 늘 넘치도록 내주고, 그 넘침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온전히 사람의 몫으로 남겨 둔다는 것을. 그 넘침 앞에서 나는 비로소 나눔이라는 오래된 지혜를 떠올리게 되었다.
다 먹지 못해 시작된 이웃과의 나눔
혼자 사는 살림에 애호박 열댓 개는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매 끼니 호박전을 부치고 된장국에 썰어 넣어도, 텃밭이 내주는 속도를 사람 입이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봉지를 들고 이웃집 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괜히 폐가 되지 않을까 망설였는데, 시골 인심은 그런 걱정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애호박 좀 드세요" 하고 건네면, 며칠 뒤 옆집 할머니는 손수 담근 열무김치 한 통을, 아랫집 아저씨는 갓 딴 오이며 가지를 봉지 가득 담아 되돌려주셨다. 애호박 몇 개가 오가는 사이에 안부가 오갔고, 텃밭 이야기가 오갔고, 그렇게 서먹하던 이웃과 어느새 얼굴을 트고 정을 나누게 되었다. 어떤 날은 애호박을 건네러 갔다가 평상에 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오기도 했다. 그 사소한 왕래가 시골살이의 외로움을 조용히 덜어 주었다. 도시에서 살 때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는데, 시골에서는 애호박 한 봉지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는 다리가 되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텃밭이 필요 이상으로 열매를 내주는 데에는 다 까닭이 있었다는 것을. 그 넘치는 풍요는 나 혼자 다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라고 내준 몫이었다. 애호박은 그렇게, 오래 잊고 지냈던 나눔의 계절을 내 삶에 다시 데려다 놓았다.
넘치는 애호박을 갈무리하는 지혜
그래도 나누고 남는 애호박은 있기 마련이라, 나는 여름 내내 갈무리하는 방법을 하나씩 익혀 갔다. 가장 손쉬운 건 역시 얇게 썰어 말리는 것이다. 애호박을 반달 모양으로 도톰하게 썰어 채반에 널고 햇볕 좋은 마당에 이틀만 두면, 물기가 쏙 빠진 호박고지가 된다. 이렇게 말려 두면 한겨울에 물에 불려 나물로 무치거나 볶아 먹을 수 있는데, 여름 햇살을 머금은 그 맛이 생것과는 또 다르게 깊고 쫄깃하다. 말릴 새가 없을 때는 채 썰어 소금에 살짝 절였다가 물기를 꼭 짜서 냉동실에 얼려 두었다. 이렇게 얼려 둔 애호박은 나중에 전을 부치거나 국을 끓일 때 그대로 꺼내 쓰면 되니 한여름의 수고가 겨울의 반찬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볕 좋은 날이면 마당 가득 널어놓은 호박고지가 꾸덕꾸덕 마르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졌다. 애호박전을 부치는 고소한 냄새가 마당을 넘어가면, 이웃이 접시를 들고 마실을 오기도 했다. 그렇게 갈무리는 다시 나눔으로 이어졌다. 텃밭에서 거둔 것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겨울까지 이어 쓰는 이 갈무리의 시간은, 계절을 저장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몸으로 알게 해 주었다. 여름의 노동이 곧 겨울의 밥상이 된다는 것, 그 순환의 이치를 애호박 한 소쿠리가 조용히 일러 주었다.
돌이켜 보면 애호박은 그저 흔하고 값싼 여름 채소일 뿐이다. 하지만 그 흔한 열매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결코 흔하지 않았다. 기다려 주지 않는 계절의 속도, 사람의 그릇을 넘어 내주는 자연의 넉넉함, 그 넘침을 이웃과 나누며 다시 채워지는 정, 그리고 여름을 겨울까지 이어 저장하는 갈무리의 지혜까지. 다 먹지도 못할 걸 알면서도 나는 오늘도 넝쿨 아래를 살핀다. 이제는 그것이 나 혼자 배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곁에 있는 이들과 이 여름의 풍요를 나누기 위해서라는 걸 안다. 텃밭은 그렇게, 가장 소박한 열매로 가장 오래된 진리를 매년 다시 일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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